용인대학교 택견동아리 북새통 BSTC2009 하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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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과 일에 있어 그리워서 눈물이 난다라는 표현이 이 시기가 들어갈 것이다.
복학 당시 용인대 팀은 굉장히 불안정한 팀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형제라는 것을 느꼈다. 모든 직책과 위치, 학번을 다 떠나서.

I’m gonna win in sin city, again!!

동아리의 회원은 거의 다 빠져 나간 상태였고 신입생은 단 한명도 없었다. 동아리의 채무상태는 빨간금이 그어지기 직전이었다. 복학당시 나는 날개를 잃은 과거 영광만 남은 에이스였던 녀석이었고 동기들도 함께 복학하였다.

우리 동기들은 모두 출신협회가 달랐다. 하지만 신입생시절부터 이상은 같았다. 성격도 서로 매우 달랐지만 함께 추구하는 택견의 이상향과 발전방향은 일치했다. 친한친구, 동지 그리고 학업에 대한 파트너였다.

복학당시 대한택견外의 학생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우리가 복학을 했었고 그 당시 전공은 선생님과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 사이에 택견협회에 대해 갈등양상이 있었다. 먼저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흐름과 움직임에 의해 그렇게 진행이 되어왔다.

복학하고 성격상 회장을 맡게 되었는데, 문제는 전공의 갈등과 동아리의 그 당시 현재상황 그리고 아이가 생기는 나의 개인적 상황까지 줄줄히 겹쳤다… [지금 다시 겪으라면 불가능할 수 있다, 아버지가 나의 큰 지원군이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이런 난관들이 있었지만 나의 동기들은 내가 없을 때 내 역활 이상의 능력을 해주었고 후배들 역시 자신들이 회장인 마냥 항상 정말 한몸인 것처럼 움직였다. 그 당시 우리는 공동의 목표가 매우 뚜렷했고 무엇을 해야 우리의 흥미와 성취가 오는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건들이 있기에 여러가지 사연들이 있는데, 위에 말했던 택견의 문제점으로 휴학을 했던 후배들이 돌아오면서 공감하는 부분과 학교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 그리고 그들의 염원, 한 정말 강한 후배의 눈물이 있었다. “형님, 왜 이제야 오셨어요…” 하면서 말하는데 가슴이 아릿하면서 아프고 불이 올랐었다.

그렇게 나의 개인적인 사건들, 학교의 사건들, 동아리의 사건들을 뚫고 동기들, 후배들과 진행시켜서 정말 많은 회원과 응집력을 보유했던 시점이 08-09년이었는데… 09년이 눈물의 기억으로 남은 것은 극한류멤버… 구큰타 회장시절 함께 고생한 멤버를 극한류라고 부르는데 그 형제들 중에 한명이 다치고 한명은 그 일로 인해 정신적 후유증을 겪었다. 그리고 그 둘에게 가장 내가 열정을 쏟았던 기간이다. 그리고 그만큼 느끼고 교육과 형제애는 다그치지 말고 기다리고 기대하고 사랑과 열정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느낀 해이기도 하다.

그 일이 있고선 우리는 정말 많은 사람들과 싸웠다. 협회와 싸웠고 국회의원과 학교와도 싸웠다. 그 형제는 그 당시에 등록도 어렵게 해서 구큰타와 같이 살았는데 모두가 학교생활에 대해서 대부분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다쳤는데 사람을 파리취급을 했었다.[우리가 느끼기에…] 결국 싸운 끝에 일부분을 보상 받아서 지나갔다.

그 당시 나와 시합의 경험에 대한 것이 감독, 코치 능력(?)으로 꽤 전환된 시점이었는데 선수들도 꽤 능력들이 좋고 잘 받쳐줘서 우승이 이전 해보다 쉽게 가능하겠다라고 느낀 해였는데 큰 사건들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선수들은 우리 멤버 하나라도 없다면 우승은 의미가 없다라고 해서 시합을 포기하게 되었다. 내 기억으로는 정말 모두가 힘든 결정이었는데 고맙고 아직도 가슴이 뭉클하다. 만들면서 잠깐 눈물 좀 흘렸다.

그 이후 택견을 그만두고 학교도 그만둘까 한 해이기도 하지만.
후배녀석의 기대치와 내 목표가 그 사건으로 흔들리면 인생이 아까워서 방황 좀하다 돌아온 해였고 그만큼 성장도 있던 때였기에 애뜻하다.

구큰타
구큰타
옛 웃대에 거주하면서 태껸 연구랑 위대태껸연구센터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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